참으로 우주롭다…선과 구로 조각한 '미지의 세계'

입력 2022-09-22 16:53   수정 2022-09-23 02:54

유한한 존재의 근원적 숙명일까. 인간은 늘 우주를 꿈꾼다. 무한하고 비밀스러운 ‘미지의 세계’ 우주는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조각가 문신(文信·1923~1995)에게도 우주는 언제나 ‘향하고 싶은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작품 속에 자신이 찾아낸 우주의 원리를 담았다. 1985년에 만든 조각작품 ‘우주를 향하여’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기하학적 형태의 조각들은 서로 얽혀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작품의 표면은 맑은 날에도, 흐린 날에도 언제나 하늘을 비추며 현실에 동화된다.

선과 구(球)로 현실과 우주를 작품에 담아낸 문신이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서울 정동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문신의 100번째 생일을 맞아 대규모 회고전 ‘문신:우주를 향하여’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장르도 다양하고, 규모도 크다. 회화부터 조각, 드로잉, 도자기 등 총 23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문신의 작품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다.
韓·日·佛을 넘나든 예술가

문신의 본명은 문안신(文安信)이다. 그는 1923년 일본 규슈의 탄광촌에서 조선인 노동자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를 대표하는 작품은 대부분 조각이지만, 시작은 회화였다. 문신은 다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경남 마산(현재 창원시)으로 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두 살이 되자 그는 ‘태서명화’라는 화방에 취업해 피카소, 고흐, 세잔 등 서양 미술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고 싶었던 소년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3년 일본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수료한 뒤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 대구, 서울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만든 게 ‘고기잡이’(1948), ‘닭장’(1950) 등의 유화 작품이다. 당시 문신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보다 일상 속 체험에서 나오는 것을 소재로 삼았다. 마산 앞바다에서 거친 파도를 넘나들며 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고,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닭장 앞에 앉아 있는 농민의 모습도 작품이 됐다. ‘닭장’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소장했던 작품으로 최근 국가에 기증됐다.

문신의 초기작은 조각가로서의 자질을 보여준다. 그는 회화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액자마저도 작품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고기잡이를 감싸고 있는 나무 액자를 보면 바닷속을 헤엄치는 해녀들이 새겨져 있다. 문신이 직접 제작한 부조 작품이다. 해녀들의 풍만한 몸매에서 나오는 매끄러운 곡선과 역동적인 어부들의 고기잡이가 함께 어우러진다.
조각에 생명을 담다
문신이 본격적으로 조각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건 1961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고 나서다. 그는 생계를 위해 파리 북쪽에 있는 라브넬에서 고성(古城)을 수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추상적 형태와 구조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현실 세계를 캔버스에 재현하는 대신 점, 선, 면 등 순수 조형 요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문신에게 만물은 원과 선이었다. 원과 선은 곧 우주의 원리였고, 원과 선을 통해 조각에 생명을 담았다. 마호가니와 청동으로 제작한 ‘개미’ 조각 연작이 대표적이다. 작은 원, 큰 원, 타원, 반원이 선으로 연결된 모습이 마치 머리·가슴·배로 나눠진 개미의 모습 같다. 사실 문신은 개미를 만든 게 아니었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싸우다가도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개미의 모습에 인간의 삶을 투영한 것이었다.

그는 ‘좌우대칭의 작가’로 불리기도 하지만, 일부 작품은 사실 완벽한 좌우대칭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는 생명체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개미 연작 중 하나인 ‘개미(라 후루미)’(1985)는 머리 위 더듬이 길이가 서로 다르다. ‘무제’(1990)는 대칭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불완전한 형태들이 서로 엮여 있지만 이들은 미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문신은 작품을 만들기 전에는 수많은 드로잉으로 촘촘히 구성을 설계했지만, 막상 기구를 손에 쥐는 순간엔 그의 본능에 맡겼다고 했다.
“나는 신처럼 창조했다”

그의 조각은 미술관 안에만 있지 않았다. 그가 서울 올림픽 개최를 기념해 만든 ‘올림픽 1988’(1988)은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에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묵주알을 연상시키는 구 20개가 절반씩 하늘을 향해 연결돼 있다. 작품 높이만 25m에 달한다. 당시 미국 NBC 방송은 이 작품을 두고 “세계 72개국 191명 예술가의 작품 중 최고 명작”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전시회의 제목이기도 한 ‘우주를 향하여’(1985)도 야외에 있을 때 더욱 빛난다. 원래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밖에 설치돼 있던 이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앞으로 옮겨졌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작품의 매끈한 표면은 때로는 푸른 하늘을, 때로는 밤하늘을 담는다. 관람객은 그 속에 비친 현실을 보는 동시에 미지의 세계를 꿈꾼다. 그가 평가한 자신의 인생도 그랬다. “나는 노예처럼 작업했고, 시민과 함께 생활하고, 신처럼 창조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9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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